최근 한미 통상 관계의 주요 이슈로 떠오른 ‘미국의 상계·반덤핑 관세 협상’. 미국은 자국 산업 보호를 명분으로 수입 제품에 대한 고율 관세를 부과하는 조치를 확대해 왔다. 이에 따라 한국 수출 기업들—특히 철강, 석유화학, 전자 부품 업계—는 미국 시장 내 가격 경쟁력 약화를 우려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흐름 속에서도 한국 정부는 “시간에 쫓기지 않겠다”며 여유 있는 스탠스를 고수하고 있다. 왜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협상 타결을 서두르는 쪽이 불리하기 때문이다. 미국과의 관세 협상은 단순한 세율 조정이 아니라 정치적, 전략적 고려가 얽힌 게임이다. 현재 미국은 자국 내 산업 보호와 중국 견제를 동시에 추진하는 가운데, 동맹국들과의 무역 질서를 재정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 안보 동맹 이상의 경제 파트너로서의 가치를 부각시키고 있다.
미국은 지난해부터 IRA(인플레이션 감축법), CHIPS법, 바이 아메리카(Buy America) 정책 등을 잇달아 내놓으며 자국 중심의 공급망 구축에 집중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반도체, 2차전지, 철강, 전기차 부품 등 전략 품목 수출은 오히려 미국의 산업정책과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는 부분이 많다.
특히 한국은 반도체, 배터리 등 분야에서 미국 내 투자를 강화하며 우호적인 경제 동맹으로 입지를 굳히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등 국내 기업들은 이미 조지아, 테네시 등지에 수조원대 공장을 짓고 있고, 이 같은 ‘선제 투자’는 관세 협상에서 한국 측에 전략적 우위를 제공한다.
즉, “이 정도 투자했는데 관세로 불이익을 주겠느냐?”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셈이다.
정부도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최근 공식적으로 “미국과의 협상은 장기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으며, 시간을 무리하게 단축하려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는 곧 협상에서 ‘절박함’을 드러내지 않겠다는 뜻이다. 조급함을 드러낼 경우, 상대는 이를 협상 카드로 활용해 보다 불리한 조건을 밀어붙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미국 내부 상황도 변수다. 2024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 자국 산업 보호를 강조하고 있어 관세 정책 변화는 정치적 입김에 크게 좌우된다. 특히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선될 경우 보호무역주의는 더욱 강화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정권 교체 가능성’까지 염두에 둔 복수 시나리오를 마련해 움직이는 중이다.
일각에선 “한국 수출기업들이 하루하루가 급한데, 정부가 너무 느긋한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하지만 정부는 단기 수출 회복보다 구조적 관세 리스크 해소에 무게를 두고 있다. 실제로 최근 일부 품목은 잠정관세 인하 조치나 협의 절차를 통해 숨통이 트이고 있으며, 산업별 협회 차원의 로비 활동도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먼저 타결할수록 불리하다”는 국제 협상의 철칙이다. 미국은 캐나다, EU 등 주요국들과 순차적으로 무역 협정을 재협상하고 있다. 선례를 남기면 후속 협상국들이 그보다 나은 조건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미국도 무조건 먼저 합의하는 데 부담을 가진다. 결국 한국이 협상을 서두를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이번 관세 협상에서 몇 가지 핵심 원칙만 지키면 충분히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고 본다.
- 미국 내 투자 확대를 지속하면서도 실효성 있는 성과를 확보할 것
- IRA와 같은 인센티브 제도를 적극 활용해 경제적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할 것
- 관세뿐 아니라 기술·환경 규제 등 ‘비관세 장벽’까지 포함한 포괄 협상을 추진할 것
미국이 자국 중심 무역 전략을 고수하는 한, 관세 협상은 단기 이슈가 아니라 지속적 관리가 필요한 전략 게임이다. 한국은 이 판에서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고전의 지혜를 따르며, 신중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입지를 굳혀가고 있다.
지금 한국은 조급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카드는 꽤 괜찮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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