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멘트 업계가 고심 끝에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최근 대한시멘트협회를 비롯한 업계 주요 관계자들은 “미국, 유럽연합(EU)처럼 현실적인 환경 기준 완화가 필요하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탄소중립이라는 대의에는 공감하지만, 지나치게 엄격한 국내 규제는 산업 생태계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는 절박한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현재 한국 시멘트 산업은 전 세계에서도 손꼽힐 만큼 강력한 환경 규제의 적용을 받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온실가스 배출권 제도다. 정부는 시멘트 산업에 대해 연간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 목표를 지속적으로 높이고 있으며, 이에 따라 기업들은 감축할당량을 초과할 경우 막대한 비용을 들여 배출권을 추가 구매해야 한다.
하지만 업계는 “시멘트 제조공정 특성상 물리적으로 감축할 수 있는 한계가 있다”고 토로한다. 시멘트는 석회석을 고온에서 소성(燒成)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이산화탄소가 발생한다. 전기를 신재생에너지로 바꾸거나 공정 개선을 한다고 해도, 화학 반응 자체에서 탄소가 나오기 때문에 기술적 감축 여력이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이에 비해 미국과 EU는 다소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다. 미국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통해 친환경 설비 투자에 대해 대규모 세액공제와 보조금을 지원하고 있다. 탄소 배출은 줄이되, 기업들이 경쟁력을 잃지 않도록 정부 차원의 지원책을 병행하는 것이다.
EU 역시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도입해 수입품에 탄소비용을 부과하는 대신, 역내 기업들에게는 '탄소누출 방지'를 이유로 배출권 무상 할당을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다. 한마디로 "규제는 하되, 생존 가능성은 보장"하는 전략을 쓰고 있는 셈이다.
반면 한국은 탄소 감축 목표만 높이고, 실질적인 산업 경쟁력 보호 장치는 미흡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시멘트협회 관계자는 “배출권 가격이 톤당 10만 원을 넘어선 상황에서, 추가 부담이 가중되면 생산 단가가 급등할 수밖에 없다”며 “결국 이는 건설비용 상승, 전반적 경기 둔화로 이어질 우려가 크다”고 지적했다.
특히 시멘트 산업은 단순 제조업이 아니다. 국내 기반 인프라 산업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아파트, 도로, 교량, 항만 등 국가 기간시설에 필수적인 자재가 바로 시멘트다. 따라서 시멘트 생산 차질은 곧바로 사회 전체 비용 증가로 연결될 수 있다.
업계는 최근 정부에 몇 가지 현실적 제안을 했다. 첫째, 탄소감축 목표를 산업 특성에 맞게 재조정할 것. 둘째, 감축설비 투자에 대한 세제 혜택 및 보조금을 확대할 것. 셋째, 배출권 무상할당 비율을 현행보다 상향하거나, 탄소국경조정제도와 연계해 국내 기업을 보호할 것.
일부 기업은 자체적으로 친환경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 시멘트 원료를 대체할 수 있는 산업 부산물(슬래그, 석탄재 등) 활용 비율을 높이고, 탄소 포집·저장 기술(CCS) 실증 프로젝트에도 투자하고 있다. 그러나 업계는 “민간 기업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정부의 정책적 지원을 절실히 요청하고 있다.
전문가들도 비슷한 진단을 내놓고 있다. 산업연구원 관계자는 “탄소중립은 반드시 가야 할 길이지만, 산업 경쟁력을 무시한 일방적 규제는 오히려 탈산업화를 촉진할 수 있다”며 “미국, EU처럼 규제와 지원을 병행하는 전략적 균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사실 한국은 이미 주요 선진국 대비 이산화탄소 감축 속도가 빠른 편이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국내 기업들은 여전히 '추가 감축'을 강요받고 있다. 업계에서는 “국가 이미지와 실제 산업 현실 사이에 괴리가 존재한다”며, 보다 정밀하고 현실성 있는 정책 설계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금은 단순한 '탄소 감축'을 넘어, '지속 가능한 성장'이라는 관점에서 산업정책을 재편해야 할 때다. 규제는 필요하지만, 기업이 숨 쉴 수 있는 여지도 마련해줘야 한다.
시멘트 산업은 국가경제의 뿌리다. 그 뿌리가 꺾인다면, 어떤 탄소 감축도 지속 가능하지 않다. 한국이 미국, EU처럼 환경과 산업의 균형을 맞추는 길로 나아갈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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