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닉스 빠지자 한화로?…한미반도체, HBM라인 직원 빼 이동 논란
국내 반도체 장비업계의 핵심 기업 한미반도체가 최근 HBM(고대역폭 메모리) 라인 인력을 일부 철수시켜 한화 쪽으로 투입한 것으로 알려지며 업계에 미묘한 파장이 일고 있다. HBM 시장의 ‘절대강자’ SK하이닉스와 긴밀한 협업관계를 맺어왔던 한미반도체가 갑작스레 전략적 방향을 전환하며 인력 재배치를 단행한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이번 인력 이동은 SK하이닉스의 HBM 주문이 일시적으로 줄어든 시점에 맞물려 이뤄졌다. SK하이닉스는 지난 2년간 HBM3 등 차세대 메모리 제품의 대량 생산에 집중하면서 한미반도체의 핵심 장비를 활용해왔고, 양사의 공고한 협력은 국내 초격차 기술의 상징으로 평가받아왔다. 하지만 최근 하이닉스의 수주 조정 기류와 함께 새로운 HBM 투자처로 한화가 부상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한미반도체는 HBM 관련 테스트 및 패키징 장비에서 독보적인 기술력을 갖추고 있으며, 엔비디아를 비롯한 글로벌 AI 기업들의 수요 증가에 발맞춰 몸값이 크게 뛰었다. 이런 가운데 한화시스템을 주축으로 한 한화그룹의 반도체·AI 투자 확대가 본격화되면서, 한미반도체가 새로운 고객사에 눈을 돌렸다는 해석이 나온다.
실제로 최근 한화가 발표한 차세대 패키징 및 AI 반도체 투자 계획은 수천억 원 규모에 달하며, 이를 위한 테스트 장비 구축 및 양산 인프라 조성이 시급한 상황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한화가 단순한 수요처가 아닌, 장기적인 HBM 파트너로 부상하면서 한미반도체가 전략적 선택을 한 것”이라고 분석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SK하이닉스와의 관계에 균열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이닉스는 한미반도체와의 독점적 공급관계를 바탕으로 HBM 공정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왔는데, 갑작스러운 인력 재배치는 향후 공급망 리스크로 작용할 수 있다. 특히 한미반도체 내부에서도 핵심 기술인력이 빠져나가면서 일시적으로 생산 효율에 차질이 생겼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이와 관련해 한미반도체는 “특정 고객을 위한 일방적 조치는 아니다”라며 “시장 다변화 전략의 일환으로 새로운 고객사 대응력을 높이기 위한 조직 조정”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업계는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분위기다. 그동안 하이닉스가 사실상 ‘주 고객사’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해왔던 상황에서의 급격한 변화는 분명 신호로 읽힌다는 것이다.
한편, 한화 입장에서는 이번 한미반도체와의 협력 강화가 단순한 장비 도입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한화는 방산, 우주, AI, 반도체 등 미래 기술영역을 그룹 차원에서 집중 육성하고 있으며, 이번 HBM 인프라 확보는 자사 반도체 밸류체인 완성을 위한 핵심 포석이다. 기존에 AI 칩 설계 등에서 성과를 낸 한화시스템과 더불어 반도체 패키징까지 영역을 확장하려는 포석이다.
결국 이번 한미반도체의 인력 이동은 단순한 리소스 조정이 아니라 국내 반도체 생태계 내 힘의 균형 변화를 상징하는 장면으로 해석된다. 전통적 강자인 SK하이닉스와의 거리를 조금씩 조정하며 새로운 전략 고객군으로 이동하는 한미반도체,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며 빠르게 판을 키우는 한화. 향후 이들의 협력이 단발성에 그칠지, 혹은 새로운 HBM 연합의 탄생으로 이어질지는 업계의 초미의 관심사다.
변화의 시작은 조용했지만, 그 파장은 결코 작지 않다. HBM이라는 미래 기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국내 기업 간의 묘한 힘겨루기 속에서, 누가 진짜 ‘다음 반도체 전쟁’의 주도권을 쥘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