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의 혈관, 해저 케이블…미·중 ‘바닷속 데이터 전쟁’ 치열해진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전 세계를 연결하는 데이터의 길이 있다. 바로 해저 광케이블이다.
우리가 매일 쓰는 인터넷, 클라우드, AI 학습 데이터 대부분은 위성이 아니라 바다 밑 1~2cm 두께의 케이블을 통해 흐른다. 그리고 지금, 이 케이블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 경쟁이 심화되고 있다.
특히 생성형 AI와 초거대 데이터센터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해저케이블은 '디지털 동맥'에서 '국가 전략자산'으로 격상됐다. 데이터 주권과 안보, 글로벌 네트워크 장악력을 둘러싼 **‘바닷속 신냉전’**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 AI가 해저케이블 수요 폭증시킨다
AI 모델은 단순한 컴퓨터 연산 그 이상이다.
초거대 언어모델(LLM) 하나를 훈련시키기 위해선 수천 TB의 데이터를 글로벌 서버로부터 빠르게 주고받아야 한다. 이 모든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연결해주는 것이 바로 해저케이블이다.
2024년 기준, 전 세계 데이터 트래픽의 약 95% 이상이 해저 광케이블을 통해 이동한다.
특히 미국, 일본, 한국, 유럽을 잇는 환태평양-환대서양 루트는 데이터 전송량이 매년 두 자릿수로 증가하고 있다.
AI 클라우드 기업들이 미국-동남아, 미국-인도, 중국-아프리카 간 새로운 루트를 경쟁적으로 확보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미국의 전략은 ‘민간 중심+보안 통제’
미국은 메타,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등 빅테크 중심으로 해저케이블 투자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들은 자체 글로벌 데이터센터를 연결하기 위해 해저망 구축에 수십억 달러를 투입하며, ‘디지털 실크로드’를 구축 중이다.
대표적으로 구글은 ‘퓨나루루트’와 ‘에퀴아누’ 케이블을 통해 미국-호주-일본과 아프리카를 연결하고 있으며, 메타는 동남아-미국 간 Bifrost 케이블에 투자 중이다.
하지만 동시에 안보 논리도 강화하고 있다.
2020년 이후 미국은 중국이 참여한 해저망 프로젝트에 대해 해외투자심의위원회(CFIUS)와 국가통신정보국(Team Telecom)을 동원해 적극 제동을 걸고 있다.
중국 화웨이 해양이 주도하던 **‘피스(Peace) 케이블’**이 대표적인 예다. 미국은 이 케이블이 중국의 정보 수집 통로가 될 수 있다며, 자국 내 연결을 허용하지 않았다.
■ 중국은 ‘국가 주도+글로벌 확장’
반면 중국은 정부 주도 + 글로벌 남반구 확장 전략으로 맞서고 있다.
특히 일대일로(一帶一路) 전략의 디지털 확장판으로 ‘디지털 실크로드’를 추진, 동남아·중동·아프리카를 연결하는 해저케이블 사업에 국유기업을 앞세워 진출 중이다.
중국 통신장비 업체인 화웨이 마린(현 HMN테크)은 전 세계 100개 이상 해저망 프로젝트에 참여해왔으며, 최근에는 아프리카 동부중동중국을 잇는 신노선 구축에 나서고 있다.
이와 함께 AI 데이터센터도 아프리카와 중동에 구축하고 있어, 해저망 + 데이터센터 통합 패권을 지향하는 모습이다. 이는 서방의 봉쇄 전략에 대한 중국식 우회 노선 확보 전략으로 읽힌다.
■ ‘디지털 나토’ vs ‘디지털 비동맹’ 구도 확산
미국과 일본, 유럽이 주도하는 **디지털 나토(Digital NATO)**와
중국과 글로벌 남반구, 비동맹 국가들이 연대하는 ‘디지털 비동맹’ 구도가 해저케이블 시장에서도 재현되고 있다.
특히 데이터 암호화, 통신 표준, 감청 기술, 라우팅 체계까지 국가 간 입장이 달라지면서
해저망 하나에도 ‘누가 만들었는가’, ‘어느 나라와 연결되었는가’가 중요한 안보 이슈가 되어가고 있다.
일례로, 유럽의 일부 국가는 중국산 케이블이 자국 해역을 지나가는 것을 제한하거나, ‘감시 장치 설치’를 의무화하는 규정을 도입하고 있다.
■ 한국은 ‘디지털 관문’ 위상…새 기회 맞이
한국은 지리적으로 미국과 아시아를 잇는 핵심 관문에 위치해 있다. 부산, 목포, 제주 등은 이미 주요 해저케이블 기착지로 활용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SK브로드밴드, KT, LG유플러스 등이 글로벌 해저망 투자 확대 및 데이터 허브 구축에 본격 나서고 있다.
또한 AI 반도체-데이터센터-클라우드 산업이 급성장함에 따라, 한국 역시 ‘디지털 허브 국가’로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타이밍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정부가 2025년부터 해저케이블 투자에 대한 세제지원과 규제완화에 나서기로 하면서, 민관 공동의 디지털 인프라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 결론: 눈에 보이지 않는 패권의 전쟁터, 바닷속
AI가 전 세계를 바꾸고 있는 지금, 진짜 전쟁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해저 1m 아래, 그 가느다란 광케이블이 새로운 경제 질서와 안보 구도의 핵심 축이 된 시대.
미국과 중국은 이미 이 ‘데이터의 동맥’을 장악하기 위한 바닷속 전쟁에 돌입했다.
앞으로 누가 더 빠르고 안전하게 데이터를 실어 나르느냐에 따라 디지털 주권의 승패가 갈릴 것이다.
한국 역시 지금, 바닷속에서 기회를 잡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