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판값 80만 원선 붕괴…철강 울고, 조선 웃고
국내 철강업계의 수익성을 떠받쳐온 후판(厚板) 가격이 톤당 80만 원 선 아래로 떨어졌다. 고부가가치 후판은 조선, 건설, 플랜트 등 대형 산업의 기초소재로 쓰이는 핵심 제품군으로, 가격 변동은 철강과 조선 양 산업의 희비를 가르는 지표로 작용한다.
철강업계에 따르면 최근 국내 주요 철강사와 조선사 간 2024년 상반기 후판 공급단가 협상 결과, 톤당 가격이 70만 원대 중반선에서 최종 타결됐다. 이는 작년 하반기보다 약 5~10만 원 낮아진 수준으로, 2021년 말 120만 원을 돌파했던 ‘슈퍼 사이클’ 당시와 비교하면 40% 가까이 하락한 셈이다.
■ 철강업계 “원가 역마진 현실화”
철강사들은 이번 가격 하락에 깊은 우려를 표하고 있다. 원재료 가격은 여전히 높은 반면, 후판 판매가는 급락하면서 수익성 압박이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석탄, 철광석 등 주요 원료 가격이 고점 대비 완전히 꺾이지 않은 상황에서, 제품 가격만 떨어지면 사실상 역마진 구조”라고 토로했다.
특히 후판은 고로(高爐) 기반 제철소의 캐시카우 역할을 해왔던 만큼, 이번 가격 인하는 실적에 직접적인 타격을 줄 것으로 전망된다. 포스코와 현대제철 등은 2024년 1분기 실적에서 후판 부문 수익성이 크게 악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 조선업계 “원가 부담 완화, 반등 발판 마련”
반면, 국내 조선사들은 오랜만에 숨통이 트였다는 반응이다. 후판 가격은 선박 건조 원가의 20~30%를 차지하는 핵심 요소로, 이번 가격 인하로 한 척당 수억 원 규모의 비용 절감 효과가 기대된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수주잔량은 늘어나고 있지만, 원자재가 급등으로 수익률이 낮아 고전해왔다”며 “후판값이 안정되면 올해부터 본격적인 수익성 개선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한화오션 등은 최근 수주한 LNG선과 컨테이너선 계약에 있어 후판 가격 인하를 반영해 원가 경쟁력을 높인 것으로 알려졌다.
■ 해운·에너지 업황 반영…후판 수요는 여전히 견조
한편, 후판 수요 자체는 여전히 견조한 편이다. 글로벌 해운 시장 회복세와 함께 LNG선,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 등의 발주가 이어지고 있으며, 해상풍력과 플랜트 건설 등 에너지 인프라 확대도 후판 수요를 견인하고 있다. 다만,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며 가격이 하향 조정된 것으로 풀이된다.
철강업계는 후판 가격 방어를 위한 고급강 비중 확대와 고객 맞춤형 제품 공급 전략으로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단기적으로는 수익성 개선보다는 물량 확보와 수주 유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 산업 구조 양극화 심화 우려
이번 후판 가격 인하는 국내 제조업 내 구조적 양극화 문제를 다시 부각시키고 있다. 철강업계는 글로벌 경기 둔화와 공급 과잉 속에서 단가 인상 여지가 제한되고 있는 반면, 조선업계는 수주 잔량 확대 및 고부가 선박 위주 전략으로 회복세에 접어들었다. 이로 인해 양 산업 간 ‘이익 전가’ 논란도 재점화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조선업 회복은 긍정적이지만, 철강사와의 공정한 수익 배분 구조가 필요하다”며 “장기적 관점에서는 산업 간 협력적 상생 모델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